– 영의 달 – 154화 / 드라마 웹 막장 소설 추천

영의 달 – 154화 / S#1 성호의 회상 ————-
넘어졌던 성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고, 침대 위의 그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얀 이불 위로 새빨간 피가 번지고 있었고, 배를 감싸 쥔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 : "안돼요 성호 씨…안돼…"
다급하게 그녀를 안고 병원으로 간 성호는 그때야 그녀가 이별을 고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기는 다행히 이상 없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안심한 듯 성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다독여주며 내심 그녀와 헤어지지 않을 이유가 생긴 것 같아 기뻐했다.
성호와 이별한 후 몰래 아이를 지우려고 했다는 그녀의 말은 믿지 않았다.
그녀라면 성호 없이도 아이를 잘 키웠을 거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걸 들켜버린 후에야 그녀는 입덧 때문에 아침에 하는 주방보조 일도 어제 날짜로 그만두었다고 이야기했다.
성호는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곧바로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다들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성아는 '요즘 세대'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했고, 성호의 아버지인 주강택 회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허미는 당연히 노발대발 화를 내며 성호를 무참히 때리기도 하고 집을 나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일부러 접근한 나쁜 여자에게 휘말린 거라 화를 내었지만 이미 자신의 운명을 타고난 생명을 버릴 순 없다며 그녀를 집으로 들여오라는 주 회장의 지시에 한 수 접었다.
앞으로 회사 일에 더 집중을 하겠다고 약속하고서는 다음 주 바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성호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하루하루 배가 불러오는 그녀에게 예쁜 임부복을 사주고, 아들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세상을 다 가진듯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퇴근 후 눈을 감을 때도 그녀가 옆에 있었다.
마음이 놓이진 않았지만, 출장도 마다치 않았다.
자신이 회사 일에 더 집중하는 걸 보여줘야 허미도 그녀를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행복에 겨워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성호와 달리, 한겨울 딸기처럼 싱그러웠던 그녀는 가을 자신의 소임을 다 하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날이 갈수록 야위어져 갔다.
그녀 : "입덧도 심해지고, 아들이라서 그런지 몸도남들보다 더 무거운 것 같아요. 근데 겉으로만 그렇지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 당신이 옆에 있잖아요.난 당신만 있으면 괜찮아요."
그녀의 말을 성호는 믿었다.
회사에서 전화해도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집안의 직원들과 허미 또한 그녀에 대한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미는 출산 이후 몸조리가 끝나면 결혼식을 올리라고 하였고, 성호는 찬성했다.
그녀도 배가 부른 채로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야위어가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곧 태어날 아이에게 주 회장과 성호가 고민 끝에 지은 '윤혁'이라는 이름을 선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녀 : "성호 씨…성호씨 일어나봐요…. 언른요…"
언제부터 산통을 겪었는지 모를 그녀가 새벽에 성호를 흔들어 깨웠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그녀는 이미 양수가 터진 후였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곤히 잠들어있는 성호를 깨울 수 없어 끝까지 버텼던 모양이었다.
잠옷바람으로 병원까지 그녀를 데리고 온 성호는 맨발로 그녀의 옆에서 그녀와 아기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엄청 난 진통에 다른 사람들은 남편의 머리채를 잡기도 한다는데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성호의 손을 맞잡는 것 말고는 큰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직전 에서야 그녀는 고통스럽다는 듯 큰 소리를 한번 내었고, 그 뒤로는 이제 아기가 아닌 윤혁이로 불리게 될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성호는 윤혁의 탯줄을 자르며 앞으로 무조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윤혁이 태어나고 성아와 허미만 병문안을 왔다.
미 : "옛날엔 다섯,여섯을 낳고도 살았다."
하지만 고생했다,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성호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이 차가운 만큼 자신이 더 따듯하게 대해주면 된다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자신이 온전히 회장직을 물려받으면 그녀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패션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성아는 파리로 떠났고, 산후조리원에서 일주일 정도 몸을 회복한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
일하는 사람이 잠은 무조건 편하게 자야 한다는 허미의 성화에 성아의 출국은 배웅해줬지만, 그녀가 산후조리원에 있는 일주일 중에 하루도 같은 곳에서 잠들지 못했다.
이제 성호는 매일 퇴근만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열면, 자신을 똑 닮은 윤혁을 품에 안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맞이했다.
출산을 했음에도 이전보다 더 그녀는 야위어 가기만 했다.
이제 조금만 물건에 부딪혀도 금방 멍이 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 : "원래 아기들은 4시간마다 깨어나서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야 해요. 나는 아기방에 있는 게 좋겠어요."
24시간 상주하는 보모가 있었지만, 그녀는 밤잠 만큼은 자신의 품에서 재우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 윤혁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그녀의 손을 잡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성호는 하루하루가 바빴다.
회사 일에 깊게 파고들수록 근무시간이 부족했고, 계열사의 일들까지 전부 확인을 하자니 전에 없던 두통이 생겼다.
그렇게 익숙함에 물들어 혼자 잠이 드는 것마저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윤혁의 100일 날.
소소하게 집에서만 치르자는 허미의 이야기에 100일하고도 10일이 지나서야 거실에서 윤혁의 100일 잔치가 열렸다.
다른 일가친척들도 부르지 않고 주강택회장,허미,성호,성아,그리고 그녀만 자리했다.
윤혁을 가운데 두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 그녀는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그녀 : "얼굴도 너무 초췌하고, 이런 모습으로 사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윤혁이가 보면 안 좋아할 거야."
양 손목에 보호대를 하고, 머릿결도 푸석푸석해진데다 광대가 드러날 정도로 야위어진 그녀를 보며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 그녀가 없는 윤혁의 100일 사진을 남겼다.
윤혁은 사내아이라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그럴수록 윤혁을 안아 드는 그녀는 더욱더 힘들어했다.
윤혁의 돌잔치를 1달 앞둔 어느 날, 2주일이라는 긴 출장이 성호에게 잡혔다.
일본의 한 기업과 거래를 성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늦은밤 출장준비를 마치고 윤혁의방에서 잠든 그녀를 몰래 깨워 방으로 데려왔다.
긴 시간 떨어져 있어야 하니 오늘 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에도 방해받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거부하는 그녀를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드러난 맨몸을 보았을 때 성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팔 뿐만 아니라 다리,허리,등 멍 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폭행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 : "윤혁이가 안겨있을 때 발버둥 치기도 하고, 워낙 멍이 잘 들잖아요. 윤혁이 안고서 계단 오르내리면서 벽이랑 손잡이에 부딪혀서 그런 거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회사일에 치어 육아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성호는 진실된 사랑을 담아 그녀를 품에안았다.
그리고 떠난 일본.
계획했던 데로 계약을 무사히 성사시키고, 며칠간 이어질 추가 미팅과 만찬을 남겨둔 그날 성호에게 비보가 들려왔다.
태풍으로 비행기 시간조차 앞당길 수 없어 예정되었던 날에 맞춰 귀국한 성호의 손에 들려진 것은 그녀의 유골함이었다.
차가워도 너무나 차가웠다.
야위었지만 따듯하게 퇴근한 성호의 손을 잡아주던 그녀의 손은 이제 더는 없었다.
그녀 : "음, 난 산보다 바다가 좋더라고요? 나중에 나 죽으면 무덤도 만들지 말고, 답답하니까 봉안당에도 넣지 말고 꼭 바다에 보내줘요."
그런 날이 이처럼 빨리 올 줄 그녀는 알았으려나?
언젠가 삶과 죽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선 자신은 바다에 뿌려달라는 이야기를 했었기에 성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바다에서 보내주었다.
이후 그녀의 동생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동생도 그녀를 찾고 있을 텐데, 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전혀 닿지를 않았다.
동생의 이름도 몰랐다.
그녀가 떠난 후 서류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성호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미 : "이미 죽은 사람물건 집에 두면 뭘 해. 내가 이미 다 처리했다."
이미 그녀의 물건들은 허미가 모두 태우거나 버린 후였기에 그녀의 주민등록번호 하나도 성호는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살았던 집 주소에 남아있는 게 없을까 싶어 비서팀을 통해 알아보았지만 어디에 살았던 누구.
이것 하나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이름과 생년월일로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성호가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과 나이,생일까지 모두 거짓이었을까?
행정복지센터 : "집 주인분들이 더러 전입신고를 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저희도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주민등록번호도 모르신다면서요. 단순히 이름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출생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고 보육원으로 이동되는 아동들은 원에서 실제 이름과 생년월이 아닌 입소날짜나 임의로 신고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 안타깝지만 이름과 생년월일로도 확인되는 게 없네요."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그녀의 가족에게 그녀의 소식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성호였다.
자신의 무능력함에 성호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수년이 흐르고 윤혁이 혼자서 계단을 오르내리고 싶다며 옹알거리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할 때,
지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강택이 죽기 전, 아이가 엄마라는 존재를 깨우치기 전에 제대로 된 사람과 정식으로 결혼하라고, 윤혁의 이야기도 이미 모두 협의 되었다며 고집으로 강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공식석상에 공개했다.
결혼식 이후 뜬금없이 그녀가 살아있을 때 갓난아기였던 윤혁의 보모로 있어주었던 사람이 성호를 꼭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취해왔다.
다른 가족들 몰래 만나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을 하기에 퇴근 이후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만났다.
더 이상 허미와도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지만, 이대로 자신이 비밀을 가지고 있기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죽을 때도 편히 죽지 못할 것 같다고 주름진 손으로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이야기했다.
보모 : "이 이야기…사모님께도 그 누구에도 하시면 안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할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무조건 저를 찾아내 무슨 일이든 버리실 분이에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노라 성호가 수십 번이나 약속을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성호는 그날과 그 말을 잊지 못한다.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성호가 출근하고 나면, 그녀에게서 윤혁을 빼앗아 허미와 보모만이 만질 수 있었다고 한다.
방에서 못 나오게 감금을 시키고 온종일 울부짖으며, 온몸을 이용해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못 들은 척 했다고 한다.
안쓰러운 보모가 몰래 방문을 열어주려다 여러 번 혼이 났고, 그렇게 매일 방문과 벽을 두드리느라 그녀의 몸은 멍투성이가 되어갔다고 했다.
성호가 퇴근하기 30분 전 방문을 열어주고 급하게 죽 한 그릇을 내어주고 방문도 열어 놓았다고 했다.
자신이 듣기로는 윤혁이 태어나기 전, 임신한 몸으로 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식구들이 출근하고 나면 청소와 빨래를 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날.
그날도 집에 성호가 없으니 가둬졌고, 방문을 열어달라며 울부짖던 그녀가 한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자 허미는 그저 '이제야 포기한 모양이다.'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가 지난 후에야 그녀가 전화를 받지않는다는 성호의 전화에, 죽 한 그릇 올려주며 전화기도 주라는 허미의 이야기에 방문을 열자 싸늘하게 식어있는 그녀를 발견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은 윤혁 때문에 보모는 병원에 갈 수 없어, 구급차에 허 미만 탑승해서 갔다고 했다.
그녀 : "(손을 어루만지며) 고생했어요. 그런데 윤혁이 만지고 싶으면 얼른 손부터 씻고 와요."
퇴근 후 방문을 열면, 미소를 지으며 반겼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성호는 그날 밤이 새도록 차 안에서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지냈지만 결국 이기적이게 그녀를 한순간도 돌보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녀를 차갑게만 대하는 허미를 보며 남몰래 시집살이는 시킬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보편적인 수준일 거라 어림짐작했던 자신을 후회했다.
잦은 위경련과 허미가 큰 기침소리라도 내면 온몸을 떨었던…그리고 점점 야위어 가는 그녀를 보면 눈치챘을 수도 있었는데, 더 빨리 그녀를 구해줄 수 있었는데 자신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이후 성호는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윤혁이외에 다른 가족들과는 대화도 제대로 섞지 않았고, 허울뿐인 결혼을 한 강주와는 처음부터 각방을 썼지만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게 했다.
강택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허미도 고은동을 떠나게 되었고 성아 또한 강주를 배려하자는 허미의 이야기에 독립했다.
윤혁의 사춘기가 시작되고, 강주가 친모가 아니라는걸 알았을 때 허미가 그녀가 없는 100일 사진을 보여주며 친모는 너무 어릴 때 죽음을 맞이했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며 거짓말을 했을때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윤혁을 앉혀놓고 너의 첫 번째 생일 한 달 전까지 살아있었다며 길고 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롯이 일만 했다.
처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둘째 딸까지 회사로 들여달라는 제안도 거절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윤혁이에게,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수를 한다고 한들 눈감아주었다.
한 명이 실수한다고 해서 무너질 회사도 아니었고, 이미 평판이 바닥인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이미지만 갉아먹을 뿐 성호에게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강주에게도 관대하게 대했다.
성호뿐만 아니라 강주도 원하지 않았던 결혼이었다.
사랑없는 결혼에, 전처의 아이까지.
한 여자의 인생으로 놓고 본다면 최악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돈을 물처럼 쓰고, 그 돈을 처가에 가져다주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이미 넘쳐나는 돈. 자신에게 피해 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사와 윤혁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차가운 인생에 생각지 못한 따듯한 바람이 몰려들었다.
그 바람은 싱그러운 딸기처럼 달콤한 향을 풍겼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고 어려워하는 일을 먼저 나서서 하고, 사람을 따듯하게 대 할 줄 아는 마음씨.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 따듯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 온기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렇게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저절로 손길이 따라갔다.
어루만져 보고 싶었다.
얼마나 보드라운지, 얼마나 물기를 머금고 있는 것인지 직접 어루만지고 느껴보고 싶었다.
혹시나 그녀가 환생했다는 착각에 빠질까 싶어 그녀와 다른 점을 비교해보기도 하고, 현실을 직시해보기도 했지만, 그때뿐.
이 작은 바람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결국 이 따듯한 바람은 성호의 심장을 어루만지기 시작했고 고장이 난 태엽으로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재하며 욕심부리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이 욕심을 내었다 이 따듯한 바람마저, 가지고 있는 싱그러움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호 :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수없이 자신을 되새겼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의 손을 잡으려 뻗어 가고 있는 자신의 팔이 보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윤혁이 자신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라며 바람을 소개했다.
순간 '내 것인데'라는 미친것 같은 속마음이 튀어나왔지만,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단념할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며 잘 되었다 생각했다.
남들기 보기엔 화려하고 그녀의 말처럼 반짝거리는.
하지만 속은 텅 비어 차가움만 공존하는 집에 바람이 불었다.
매일 바람이 작아지지는 않을지, 따듯함을 잊지는 않을지 걱정했지만 윤혁이 옆에 있었고 예전과 다르게 성호 본인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 어떤 누구라도 지켜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협력업체 직원이었기에, 무리해 정직원으로 고용하며 바람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놓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갑자기 사라져도 이제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찾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람의 인적사항을 보았을 때 마음이 시큰거렸다.
조실부모한 것도 그녀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부모를 잃은 것이라 그녀와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비슷한 결이었기에 더욱더 신경이 쓰였다.
등본을 보았을 때도 한 차례 더 놀라고 말았다.
이모와 함께 사는 것으로 표기되어있었는데, 그녀가 살았던 동네에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주소로 가보니 그녀가 살았던 집과 멀지 않았다.
불과 한 블록 차이였다.
집에서 치러진 결혼식에서 그녀의 이모를 보았을 때, 진한 화장으로 민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람의 이모 또한 그녀와 매우 닮아있었다.
오히려 안심되었다.
성호 : '그래, 그녀가 아니야. 원래 저런 따스함을 지닌 가족에서 태어난 사람인 거구나'
바람을 괴롭히는 건 무엇이든 단절시켰다.
살가운 엄마였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빈자리를 채워주었던 강주도,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중주도 모두 바람을 괴롭히기에 단절시켰다.
하지만 왜인지 바람은 자꾸 멈추려 들었다.
한 발짝 멀리서 바람을 지켜보니, 그녀를 괴롭히는 건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등본만 보고 이모만 신경 쓰느라 당연히 친가 쪽에도 가족이 있을 것인데 미쳐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할머니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람을 계속해 멈추게 만드는 건 가족이었다.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내를 끓이며 힘들어하는 사람을 지켜본 전적이 있으며,
그 끝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호는 알고 있었다.
아들에게 똑같은 전처를 밟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자신에게도.
바람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었지만, 손을 내밀었지만 역시나 바람은 손을 잡지 않았다.
혼자서 해결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녀와 똑같이 시들어가는 바람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처리는 하지 않지만 조력자가 되어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순간.
한순간도 잊어 본 적 없는.
날마다 그리워하는 그녀가 여느 때처럼 꿈에서 자신을 어루만져주던 다음날.
평소와 다르게 자신에게 살갑게 구는 바람을 보며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바람.
바람만 있으면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 이 공간에 자신과 바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자신을 밀어낼 줄 알았던 바람이 오히려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더욱 마음이 녹아내렸다.
한 순간의 실수와 미안함이라는 명목으로 오히려 자신이 사과하려 드는 바람 때문에 화가 났다.
사과는 오히려 이성의 붙잡지 못한 자신에게 있는데 왜, 바람 또한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에 빠져 사는 걸까.
어두운 밤을 보내며 성호는 깨달았다.
바람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윤혁이 아닌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
둘의 지금의 관계는 성호의 결심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람을 안전하게 지켜낼 것이다.
무조건 안전하게 지켜내야 할 이유가, 성호 자신만 아는 이유가 존재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