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의 달 – 120화 / 드라마 웹 막장 소설 추천

영의 달 – 120화 / S#1 고은동 J.U.자택 본관 [밤] ————-
솨아-.
이른 새벽.
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고선 찬물로 급하게 세수를 했다.
끔직한 악몽이었다.
아무런 말도,표정도 없이 삽 한 자루를 손에 쥐고선 이미 너무나도 깊은 구덩이 안에 서 있는 진형이 자신의 발밑의 땅을 더욱더 파 내려가고 있었다.
영 : '아빠! 아빠!'
영은 그 모습을 높은 나무 위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고, 발 디딜 곳이 없어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수도 없이 진형을 불렀지만,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천둥·번개가 치며 진형이 서 있는 구덩이 안으로 빠르게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진형은 두 눈을 감고 차오르는 물을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구덩이에 물이 진형의 목까지 차올라 입술을 넘어갈 때쯤 영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나무에서 구덩이로 몸을 내던졌고 그때 꿈에서 깨어났다.
수건으로 얼굴에 흥건한 물기를 닦아내고 화장실 문을 여니 침대에서 곤히 자는 윤혁의 모습이 보였다.
소담과 윤혁과 함께 점심시간,쉬는시간마다 야외정원에서 음료 한 캔씩을 손에 들고 사소한 일에 웃었던 과거들이 생각났다.
윤혁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정말 행복하지만 윤혁의 옆에 계속 있어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도 매우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에게 억지로 범죄자 가족과 한패라는 꼬리표를 달게 해주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윤혁을 위해서는 경자의 말처럼 진형과 은성에 관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진성이 경자의집에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으며 온전히 현재 생활에 안주하거나,
윤혁이 더는 신경 쓰지 않게끔 영 혼자서 온전히 이 모든 일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쪽을 택하던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윤혁과의 결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냥 행복하기만을 바랐던 생활에 영과 윤혁이 아닌 제 3자 때문에 계속해서 사건·사고가 일어나니 너무 섣불리 결혼을 진행했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만약 윤혁과 단순 연인 관계 였거나 윤혁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지금 당장 경자의 집에 쫒아가 수없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경자의 집에서 숙식이라도 하면서 진성과 경자를 설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금 현재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결론이 제대로 서질 않는 상황에서 시간만 흘러가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윤혁이 깨어날까 봐 조용히 방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왔다.
온기 없는 집안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춥게 느껴졌다.
조리실로 이동해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고선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
새벽이슬이 맺힌 나무와 풀들이 진한 녹색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발등에 스져지나가는 차가운 풀잎들을 느끼며 정원 한켠에 있는 테이블에 보온병을 올려놓고선 의자에 앉았다.
금성과 소담과 함께했던 결혼식, 강주의 접시를 깨트린 일 그리고 경자가 윤혁의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손녀라고 이야기했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영 : "하아…"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시니 온몸이 차가운 물을 머금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차가운 이 공기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깨끗한 공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두 눈을 감고 심호흡을 계속했다.

영 : "엄마!"
성호 : "너무 이른 시간인데 감기 걸리지 않겠어?"
성호가 영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었다.
영 : "일찍 일어나셨네요."
성호 : "성아가 너무 피곤해해서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어, 발소리가 들리길래 나와봤는데 이렇게 있을 줄 몰랐네"
영 : "조용히 내려온다고 했는데 죄송해요"
성호 : "나한테 미안할 건 없지. 이건 뭐야?"
영 : "아, 그냥 따듯한 물인데 한잔 드세요."
성호 : "아니야 손에 쥐고 있어."
성호는 보온병을 열려는 영은 손을 막았다.
그렇게 둘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성호 : "그… 할머님과 연관된 고민 탓에 그러는 거야? 해결이 잘 안 되었어?"
영 : "아, 네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요. 역시 사람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건 힘든 거 같아요."
성호 : "부탁을 안 들어주셨나 보구나"
영 : "할머니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저로서는 정말 이해가 잘 되어서 어떻게 더 대화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이제 예전처럼 서로 보지 말고 살자고 하시는데 할머니가 저를 미워하셔서 윤혁씨까지 미운털 박힐까 봐 그것도 걱정이에요. 제 일을 윤혁씨가 걱정하고 신경 쓰여 하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고요. 집안일과 윤혁씨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성호 : "할머님과의 관계는 윤혁이에게 이야기했어?"
영 : "오래전에 이야기했어요. 최근 부탁한 일까지 이야기해서 아마 윤혁씨도 티는 안내지만 걱정이 많을 거 같아요. 서로 눈치 보는 상황이죠. 그래서 더 미안하고 마음이 갑갑하고 그런가 봐요"
성호 : "나한테 이야기해보는 건 어때?"
영 : "네? 회장님께요?"
성호 : "나한테는 더 못할 이야기야?"
영 : "윤혁씨한태 이야기한 것도 후회하는 마음이 큰데, 회장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죠."
성호 : "(심호흡을 크게 한다.) 가족이란 게 뭐라고 생각해?"
영 : "…내 편?"
성호 : "무슨 일이 있어도 우선은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가족이야. 이후 시시비비를 가린 뒤에 서로의 믿음을 깨는 상황이 오더라도 우선은 믿음 하나로, 가족이라는 이름 하나로 서로가 엮여있는 거지.
그게 꼭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도 똑같아. 식구라는 말이 왜 있겠어. 같은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은 영이 말대로 우선 내 편을 들어주기 마련이야.
그러니 가족한테까지, 식구들한테까지 말 못할 일들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겠어. 가족들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혼자서 애가 타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아.
물론 때에 따라서 가족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지켜내야 하는 게 있지, 사랑 같은 거?"
영 :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인다.)"
성호 : "그러니 혼자 너무 고민하지 말고, 윤혁이에게 이야기하는 게 힘들다면 나한테 이야기해도 좋아 뭐든지. 이모님을 찾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가족에게 먼저 털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긋나긋하고 진심 어린 눈빛을 가진 성호의 모습에 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려고 했으나,
주먹을 꽉 쥐며 입도 다시 닫았다.
성호에게 이 모든 사실을 꺼내는 것은 정말 옳지 않은 생각이라 들었다.
성호라면 당장에라도 영의 손을 잡고 경자의 집으로 쫓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 : "회장님은 산 같은 분이라고 느껴져요. 예전에는 등산로 입구에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사람처럼 회장님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너무 작아지고 초라해진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 크고 높은 산이 제 등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제가 무엇을 하던 힘이 되어주세요. 물론 윤혁씨도 저에게 힘이 되어주지만, 회장님은 다른 결로 저를 지켜주시는 분 같아요. 단순히 존재만으로도 제가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랄까?
차가운 공기를 내뿜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품어주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아요"
성호 : "산신 같은 느낌이라는 거지?"
영 : "네? 회장님 이런 농담도 할 줄 아세요?"
성호 : "묘사하는 것이 그렇잖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라산이나 태백산 같은 큰 산들에 있다는 산신. 아 산신 할머니인가? 소문으로는 한라산에 계시는 산신 할머니가 태풍을 다 일본으로 보내는 거라고 하던데 영이한태는 내가 그런 푸근하고 든든한 산신 할머니라는 존재 같다는 거지?"
영 : "윤혁씨가 가끔 이렇게 장난을 칠 때가 많은데 지금보니까 회장님 아들임이 분명한 것 같아요."
성호 : "그래? 윤혁이가 나랑 개그코드가 맞는지 몰랐는데"
영 : "진짜 똑같아요 정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